2016년 4월 12일 화요일

애니메이션 작품속의 로봇윤리

이전까지 AI로봇에 관한 이야기는 상당히 진행이 되어있었음에도 크게 와닿지는 않었는데, 최근들어서 알파고가 다시 그 여세를 몰아치며 '과학은 이정도로 눈앞에 와 있다'는 메세지를 대중에게 또 한번 전달했다.

로봇 공학자들에게는 천천히 진전되고 있었던 나름 현실적인 이야기겠지만 나같은 과알못인 애니 학도는 과거에 나왔던 로봇과 관련된 미디어 작품들을 되새겨본다.


<SF에서 빠질수가 없는 전설적인 영화, 메트로폴리스>

실제 로봇이 중심이(긴 한데)라기 보다는 계급사회와 노동계층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한 편으로는 디스토피아적인 이미지를 상당히 강력한 영상미로 전달한다. 로봇을 통해 인간들을 지배하는 어두운 미래, 모두가 밝을 줄 알았던 미래의 문명이 자본가와 노동계층으로 착취구조를 형성하며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 버린 세계.

이 작품은 후에 터미네이터, 매트릭스, 블레이드 러너 등의 영화들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특히나 작중 프레더의 대사가 눈물겹다. -아버지, 10시간의 노동은 너무 과합니다!-....)


 
<데즈카 오사무의 메트로폴리스와 그것을 리메이크한 동명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이런 시대적 담론은 만화나 애니메이션 계에도 여러 영향을 끼치는데, 대표적으로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가 있고, 또 위의 영화의 이야기를 재해석한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이 있다. -데즈카 오사무는 일반적으로는 [아톰의 아버지]나 [일본식 산업 애니메이션에 기여한 사람]으로 만 알려져 있지만 작가로서 장르의 구분이 없는 도전의식, 디테일한 작품 묘사, 굵직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능력만 하더라도 만화가 전체를 놓고 봐도 손에 꼽을 정도의 인물이다.-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데즈카 오사무의 미래적 관점을 시각적으로 많은 부분 내포하고 있지만 해석에 있어서는 아쉽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물론 영상미는 뛰어나다. 보고있으면 작화가들 죽어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일단 로봇에 관한 작품들은 단순히 로봇이 인간을 공격해오는 터미네이터 같은  류의 액션 스릴러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로봇을 타자화하는데 익숙한 우리의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이미 실제로 일상 속에 깊숙히 들어와 버린 지금은 -심지어 동물 형태로 만들어진 로봇을 발로 차는 걸 보며 동물보호협회에서 이의를 제기할 정도로- 인간이 로봇을 어떤 인격체로서 대하려고 하는 새로운 도덕성의 관점인 '로봇 윤리'의 필요성에 관한 논설들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위의 작품들이 끊임없이 던지는 주제이기도 하다.

켄이치에 있어서 티마, 그리고 마리아(헬). 또는 'A.I'의 데이비드나 '바이센테니얼 맨'의 앤드류는 어떠한가.
사이언스 픽션에서 로봇이 꿈꾸는 인간다움이란 갈망은 자연스럽게 이미 인간으로 있는 우리와 동화되면서 '인간다움이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같은 스스로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과 고뇌로 치환해간다.


<지금은 파산한 manglobe도 초창기에는 상당히 작품성있는-적어도 시도는 하는-작품을 선보이려는 노력을 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인 '에르고 프록시'는 매우 강렬한 메시지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풀어내는 방식에서 솔직히 많은 아쉬움을 보였던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높은 평을 주는 이유는 '요즘 시기에 이정도로 철학적인 담론을 담아내려는 애니메이션 작품이 그동안 없었기 때문'. 그리고 앞으로도 없게 되었다.

너무 담아낼 게 많은 주제들이 엉켜서 복선도 엉성하게 깔리다가 결국 화음을 잘 내지는 못했지만, 작품 중간중간 등장하는 소름끼칠 정도의 연출력, 그리고 데카르트 철학 서적들을 갈아넣었나 싶을 정도로(...) 깨알같이 숨어있는 흔적들(이원론, 인식의 불완전성, 완전한 신의 존재, 거짓말에 의해 창조된 허울적 세상,자신의 딸을 닮은 자동인형)은 이들이 '실제 전달하고픈 메시지'를 넌지시나마 느낄 수는 있었다. (저주받은 명작이라 불리우는 것들은 이유가 있다.)

여기서도 로봇윤리에 대한 부분은 등장하는데, 인간을 존재이유(Raison d'être)로서 바라보는 AI로봇들, 그리고 그 로봇들이 자아를 지니고 스스로 성찰을 하기 시작하면서 변화하는 과정들을 흥미로운 연출로 그려 나갔다.

<자아를 지닌 로봇은 자기의 존재이유를 너무 사랑한 결과 광기에 사로잡힌다.
스스로의 성찰, '코기토'는 어떤 의심도 없는 사유이자 진리이면서도 항상 광기의 위협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 존재이유를 잃고 흔들리는 코기토는 결국 광기에 복종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런 작품들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담론들을 우리에게 친숙한 매체를 통해서 진지하게 사유할 수 있도록 계기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어떤 논제이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준비가 필요하며 정서적인 경험이 함께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거다. (바이센테니얼 맨을 보면서 펑펑 울었던 경험이...)

다소 포괄적인 이야기로 바뀌었는데, 좋든 싫든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있고 대중으로서의 우리가 인지하는 수준은 아직까지는 단편적이다. 이런 작품들을 다시 보면서 이전의 우리들이 어떤 관점을 지녀왔고 어떤 문제나 해결책이 있을 지 곰곰히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시간이 있을 때(...)

2016년 4월 11일 월요일

엘렌 선생님의 기묘한 수업



 한국에 수학의 세미가 있다면 일본에는 영어의 엘렌 베이커가...

2016년 4월 8일 금요일

나는 중도적인가

권력이든 뭐든 관리하는 입장이 여론 앞에 놓이면 행동이든 발언이든 뭐든 간에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없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정치적으로 중도적인 성향"이라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난 그것이 모순되었다는 본론을 먼저 말하기 이전에, 그 「중도적인 성향」이라는 의견 자체가 일종의 모순이라는 걸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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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내가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앞서 적는 것 처럼 빙빙 둘러서 말하는 경우를 좀 짚고 넘어갈 텐데, 일단 그건 곡해의 여지를 사전에 남기지 않으려는 의도가 크다.

풀어보자.

-그건 곡해의 여지를 사전에 남기지 않으려는 의도가 크다.-
= 그건 -사실을 모르고 하는 착각이 아닌- 의도가 담긴 왜곡의 빌미나 가능성을 사전에 만들어두지 않으려는 생각이 -물론 다른 의도도 있지만- 더 많은 편이다.

길게 풀면 여기까지 늘일 수 있다.


요컨데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의사소통의 본질인데, 소통의 편리함에 치중하다 오히려 더 불편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

물론 일상대화에서 저렇게 조잡하게 늘어놓지는 않겠지만 그만큼 생각이나 마음의 전달은 복잡하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의도는 그렇지 않았는데 오해를 산」경우는 대체로 전달어휘가 잘못인 경우거나 혹은 어휘자체는 문제가 없었으나 시간이나 장소를 잘못 고르는 경우이다.
여지를 만들어 둔다는 것은 그런 거다. KY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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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와서, 이들이 말하는 정치적인 중도라는 건 기존에 놓인 상반된 생각들을 두고 그 가운데서 균형을 펼친다는 논리다.

지금까지의 '정치'라는게 얼마나 이미지가 좋지 않았나를 실감하게 만들어주는 부분인데, [정치]라는 사전적인 의미만을 두고 생각한다면 중도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반드시 그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에 좌나 우파같은 양립된 이념이 상존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떠오를 수 있는 발상이다.

그건 현상적인 판단일 수도 있고, 또는 드물게 좌우파의 이미지를 선입견으로 가지고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공무원들이 흔히 '정치적인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정치적인 활동이 아닌 공무의 목적으로만 움직이는 행동지침을 뜻하는 거지, 개개인의 정치성향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서인즉 이 논리는 문득문득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진보적인 사고를 가졌다'는 것 조차도 일종의 카테고리화된 의견이다. 개개인의 생각은 그렇게 쉽게 분류화 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데도 어떤 틀을 가지고 생각하며 뭉치는 것이다. 왕왕 그런 것을 가리키며 '프레임에 갇힌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런 흐름에 쓸리지 않는, 소위 말해 카테고리화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일 수록 더더욱 자신을 중도적인 성향이라고 에둘러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정치에 대해 스스로를 중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선입견의 파트를 나눈다.

이 사람들은 기존의 정치라는 것이 만들어 둔 이념에 싫증을 느낀 사람들이거나,
'정치'라는 자체에 관한 논의를 귀찮아 하는 사람들이거나,
'정치'적인 물음이 가져올 결과를 귀찮아 하는 사람들이다.

스스로 국가라는 단체에서 소속되어 살아간다고 하면 자신의 삶 전체에 법제도가 어우러져 있는 걸 느낄 것이다. 그것은 모두가 해야만 한다고 논의된 것들이 모여, 결과적으로 상호간에 하기로 합의가 된 것들이고 그게 바로 정치적인 결과물이다. 때문에 중도라고 하는 중용에 가까운 생각은 좌,우에 필적하는 새로운 이념이 아닌 그보다 포괄적인 단계에 놓인 의식수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누군가 '당신은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냐 보수적이냐'를 묻는다고 할 때 딱히 그에 관한 생각이 없다면 차라리 '모르겠다'가 좀 더 나은 대답이 될거라고 본다.

굳이 시비거는 것도 아니고 "어중간한 것을 버리고 양극화로 가라는 이야기"를 하고싶은 게 아니라, 옳고 그름을 떠나서 존재하지도 않는 개념에 스스로 나서서 소속될 필요는 없다는 거다.

분명하지 않은 것은 그것대로 인정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지, 그걸 못하는 사람들이 억지로 조상님 정체성까지 끌어모은 결과는 잘해봐야 흑백논리로 치달을 뿐이다. 애초에 진보다 보수다 스스로의 이념을 결정짓는 것 자체도 참 안타까운 일이라고 보기 때문에.




"인간은 서로 비슷한 사람들이 한패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한패가 되고 나서 서로 비슷해진다." (황상민, 연세대학교 심리학 교수)

2016년 4월 2일 토요일

지, 질렀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후략>


옆동네 어도비에서는 통합 계정관리에 들어가서 차곡차곡 월별 결제액을 빨아먹는 동안 코렐사는 착실하고 꾸준하게 옆그레이드를 실행중이다.

2015에 비해서 유저팁 지원, 파티클 브러시 확장을 제외하면 그렇다 할 변화가 없어보이는데, 2015에서 박터지게 욕을 먹었던 브러시 사이즈조절에 걸리는 렉현상을 현저히 줄이고(없애지는 못했다) 퍼포먼스를 상당히 향상시켰다.
어쩔 수 없어. 페인터는 퍼포먼스가 생명이야.

그래봤자 옆그레이드란 점은 부정할 수 없는 듯.


사실 페인터는 정품을 하나 구매하면 이후 버젼업을 할 때 가격을 상당히 할인 받을 수 있고(절반 이상), 단순히 업그레이드만 하는 게 아니라 각 버젼의 라이센스를 다 쓸 수 있기때문에 오히려 가격면에서는 어도비의 정책보다 훨씬 더 저렴하다고 볼 수 있다.

포토샵을 제외한 단일 앱 플랜을 사용할때 1년 약정으로 월 2만3천원, 포토샵 플랜을 하더라도 월 1만1천원.


그에 비해서 페인터 정품은 430USD가량 (업그레이드) 구매가격은 평균 220USD, 한정기간 세일이나 프로모션 코드를 쓴다면 최저 80USD(=10만원)까지 내려간다.



한 때는 포토샵과 함께 쌍벽을 이루던 페인터였는데 점차 깔끔한 일러스트가 각광받기 시작하니 클립스튜디오나 SAI 같은 가벼운 프로그램들에 밀려서 코어유저 층만 쓰는 프로그램이 되어버렸다. (옵션이 너무 많고 드럽게 불친절한 인터페이스도 한 몫 하지만) 12를 마지막으로 한국시장에서 발을 빼버렸으니 언어지원도 안되서 국내유저는 더 줄어들 전망 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