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22일 일요일

관계



"모든 환자는 당연히 도움을 받고자 하는 의식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다. 치료과정 속에서 환자는 지도받고 충고 받으며 가르침도 받고 격려도 받으리라는 것을 기대한다. 또한 환자는 변화가 그 자신의 의지적인 노력없이 저절로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 < A Primer For Psychotherapists(정신치료, 어떻게 하는 것인가) - K.M.Colby / 이근후 역>



어긋난 사람들의 관계를 보다 보면 마치 상담을 하는 의사와 환자의 상호관계를 문득 떠올리게 된다.


'음식으로 못고치는 병은 의사도 못고친다'는 말 처럼 사람들은 숨쉬듯이 일상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관계 속에서 서로를 치유해주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만약 그 관계를 [치료]라는 불편한 수식어가 끼는 관계로 전환 시킨다면 당연히 자신을 마치 병든 사람을 취급하는 것 처럼 불쾌해 할 것이다.


다만 불균형하거나 체질과 맞지 않는 음식을 계속해서 섭취하면 몸에 해로운 것 처럼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비정상적인 관계를 통한 학습이 지속되면 사람의 생각과 감정은 병들게 마련이다.
그렇게 보았을때 정상은 그럼 뭐냐고 묻는다면, 환경의 고려에 상관없이 상호간의 존중하는 마음가짐이 기본적으로 서있는 게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문제가 있는 사람의 문제를 기분이 나쁘지 않게 고쳐준다는 것은 지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정도까지 거리낌없는 말을 꺼내야 이 사람이 내 전화번호를 지우지 않을까' 하는 거리를 재고, 내가 어디까지 포기를 하는 게 이사람이나 나를 위한 길인지 염두를 하는데..
결국 핵심은 그 거리의 정도에 있다. 원론으로 아무리 부딪혀봤자 도달하게 되는 곳은 결국 양비론이 아니면 포괄적인 수용의 타협인데, 두가지의 공통점은 결국 나아지는 게 없다는 거다.


요즘 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이 병들어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개인적으로, 소통의 양이나 속도가 아니라 질이 떨어진다는 게 아닌가 싶다.
표현하는 행위는 당연히 많아졌지만 '그사람의 표현을 경청해 준다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보고 들었다는 경험 이상의 의미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앉아서 귀기울여 들어준다는 것은 사실 생각보다 상당히 진이 빠지는 일이다.


예를 들자면 소셜네트워크에서는 바로 그 귀기울여 듣는 다는 부분에서 '상대방을 존중하며 경청하는 상호작용'이란 것이 매우 퇴색해 있는데, 그 원인은 정보나 표현을 제공하는 사람이 단순히 많다는 양의 문제도 있고 그 수단이 표정과 감정의 톤이 섞이지 못하는 몇바이트의 텍스트에서 그친다는 질의 문제도 있다.
결국 그런게 모여서 요즘 사회에서 문제된다는 '인지적 구두쇠'현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간다.


스스로 기억하기에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쏟아냈던 시간이 만약 있었다면,

그 시간 만큼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해 주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자.



누군가에게는 의사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환자가 되면서 서로를 경험을 주고 받으며 치유해줄 수 있는 것이 곧 소통의 진짜 힘이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사회망은 넓어지고 기준점은 점점 다원화와 양극화를 반복하면서 방대해져 가는데, 그 중 몇몇은 얼떨결에 그 흐름에만 생각을 맡기다가 정작 내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만다.

'나는 누구일까' 라는 질문을 반복하면서 자기정체성을 붙들려는 노력이 있을때나 그나마 희망이 있다고 봐야겠는데, 그런 질문 조차도 내 속에서 상호존중을 가지고 진솔하게 표현하고 경청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관계의 반복이 있기에 비로소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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